▲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이 지난 23일 국장으로 치뤄진 가운데 영면을 기원하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출생과 성장....
그리고 청년 김대중
ⓒ 중부신문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신안군 하의면(荷衣面) 후광리(後廣里)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둘째 아들로 아들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의 호, ‘후광’은 고향 마을의 이름으로 평생 아호로 삼을 만큼 고향을 사랑했다.
1933년 하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김 전 대통령은 4학년을 마치고 목포로 학교를 옮겨,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등학교)를 1944년에 졸업했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상고 졸업 후 곧바로 해운회사인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으며, 이후 회사 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 사업가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자 김 전 대통령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준(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이자 곧 탈퇴하였으며, 1946년 차용애 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홍일, 홍업 두 아들을 두었다.
해방기의 정치적 혼란과 6.25전쟁, 그리고 정치 파동을 겪으면서 김 전 대통령은 올바른 정치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계에 뛰어들게 된다. 정계에 뛰어든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로 군림하고,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자 부패한 정권과 싸울 것을 다짐하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인생에서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6.25전쟁 때 공산군에 붙잡혔다가 총살 작전에 목표교도소를 탈출하여 첫 번째 고비를 넘기게 된다.
1957년 김 전 대통령은 ‘토마스 모어’라는 카톨릭 영세를 받게 된다. 이후 신앙은 그가 겪게 될 고난의 역정에서 의지가 되었고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게 했다.
ⓒ 중부신문
정치 입문에서 대통령 후보까지
정치에 입문한 김 전 대통령에게 시작부터 숱한 좌절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 번 연속 떨어진 후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민의원에 뽑혔지만 당선 3일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한 채 국회의원을 시작하게 된다.
모든 것이 암울했던 시절이지만 김 전 대통령은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나 1962년 재혼을 하게 되고 슬하에 홍걸을 둔다.
1963년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그해 11월에 목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의정 활동은 타의 모범이 되었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의원으로 정치 철학과 정책들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금융, 건설, 외교, 예산, 국방 등 다양한 상임위원회 활동을 펼쳤다.
특히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박정희 정권이 비밀회담으로 일본 비자금 1억3천만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한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 지연을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을 하므로써 본회의 최장시간 발언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열성적 활동으로 김 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철학과 소신을 갖고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1970년 김 전 대통령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뛰어 들어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철승 씨 제치고 신민당 전당대회 후보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기자회견을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미소중일 4대국 보장, 비정치적 남북교류 허용, 통일론, 예비군 폐지’ 제창하는 등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혁신적 공약을 내 세운다. 서울인구 500만중 100만이 들었다는 그의 장충단 공원 유세는 명연설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46%의 지지율을 얻었음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하게 된다.
유신 독재와의 목숨을 건 사투
대선 다음해인 1971년에 김 전 대통령은 두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국회의원 선거시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차 지방 순회 중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72년 신병치료차 일본 체류 중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선포’로 망명생활 시작하게 된다. ‘유신’이 선포되자 김 전 대통령은 일본 동경에서 유신 반대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 발표 등 독재와의 투쟁을 벌인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그를 죽음으로 내 몬다. 1973년 ‘동경납치 살해미수 사건’ 발생하게 된다. 중앙정보부 요원에 일본 그랜드 호텔에서 납치 당해 수장될 위기에서 극적 생환하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은 세 번째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된다. 하지만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게 된다.
1974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반독재 선명야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적극 지원하는 등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을 적극 지지·지원한다. 1976년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8년 선고 받는 등 옥고를 치루고, 옥고 이후에도 장기 가택연금을 받는다.
연금과 투옥 등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박해가 가해졌지만 그는 그 시간들을 분노하거나 아파하면서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역사, 철학, 경제, 문학서적 등 수백권의 책을 정독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명의 위기에서도 그는 내일을 준비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망 후 사면·복권을 받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동교동 자택에서 체포, 구속, 고문 조작 수사를 받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네번째 죽을 고비였다. 이때 국제적 구명 여론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받았으며,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집행정지로 미국 망명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도 그는 재미 ‘한국 인권문제연구소’ 창설 등 민주회복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85년 망명 2년 3개월만에 당국의 반대와 주위의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한다. 귀국 직후 김포 공항에서 대인접촉이 봉쇄된 채 격리, 가택연금을 당한다. 하지만 그해 2.12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 돌풍의 중심 역할을 한다.
평화적 정권교체
그리고 평화의 길을 열다
13대, 14대 대통령선거에 낙선했지만 1997년 마침내 김 전 대통령은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건국 이후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민주화 세력의 승리였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 자신을 그토록 핍박했던 독재자와 군사 지도자들을 용서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서 꺼내주었다.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한국은 사상초유의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고속성장의 온갖 부작용이 한국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일했다. 관치경제에 대수술을 단행했다.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누구라도 맞았고 누구라도 찾아갔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굴욕적인 IMF체제를 벗어났다. 세계는 한국을 경제우등생, 모범국가로 불렀다.
김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의 와중에서도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하고 범국민적 정보화 교육을 추진하여 한국을 세계 선두의 IT강국으로 이끌었다. 민주화운동보상법, 의문사진상규명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각종 민주화 입법을 추진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고히 뿌리 내리게 했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생산적 복지’ 정책은 그의 저술 ‘대중경제론’의 경제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의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55년만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그의 햇볕정책은 남과 북의 미움을 녹여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평화의 기운이 움트게 만들었다.
그해 12월 김대중은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과 미얀마, 동티모르 등 아시아의 민주화 인권을 신장시키고 남북화해정책을 펼친 공로가 수상 이유였다. 2003년 김대중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자연인 김대중,
행동하는 양심에 호소하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김 전 대통령은 노후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인터뷰와 강연 등을 계속적으로 해 왔다. 그런 와중에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며, 깊은 마음을 상처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추도사를 대신한 글에서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이라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며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위기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김 전 대통령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며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며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 고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에서 오열하는 김대중 대통령.
- 김대중 대통령의 살아숨쉬는 어록 -
“3선 개헌이 통과되는 날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는 조문은 장사지내는 날이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 좌익독재뿐만 아니라 우익 독재도 똑같은 적이다” (1969.7.19, 3선 개헌 반대 시국 연설회에서)
“4·19는 5·16의 안티테제다. 4·19가 정의면 5·16은 불의고, 4·19가 민주이면 5·16은 반민주인 것이다.” (1980.4.18, 동국대 4·19기념강연회)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 (1980년 11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는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있다. 무슨 말을 해도 3당 통합은 비민주적이고 반국민적이고 반역사적이다.” (1990.2.27 국회 평민당 대표연설에서)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시키겠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 바퀴와 같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1998.2.25,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가장 기뻤던 일은 IMF를 1년반 만에 극복한 것이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옷로비 사건이었다.” (1999.12.29, 장·차관급 부부 초청 송년만찬)
“첫째, 북한의 무력도발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둘째 우리도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셋째 남북이 화해 협력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햇볕정책의 핵심이며 냉전 종식을 위한 주장입니다.” (2000.3.9, 베를린자유대학 연설중에서)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저는 역사상의 위대한 승자들이 가르치고 알프레드 노벨경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2000.12.10 노벨평화상 수상연설에서)
“바르고 유능한 사람이 성공하고 약자에게도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99.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가 다같이 이 사회가 인권과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억울한 사람의 한을 풀고 정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한다. 오늘 서명한 모든 법안이 이 나라 민주화에서 금자탑 같이 중요한 법안들이다. 국민의 자유, 정의라는 가치들을 실현하는 법안들이다. 이 법의 통과와 오늘의 서명이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이정표가 될 것이다.” (2000.1.11, 개혁입법 서명식에서)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50년 동안 잃어버렸던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찾은 10년’이다.” (2007.6.9, 6·10 민주항쟁 20주년에 즈음해)
“민주개혁 세력이 제대로 반성해 시정의 모습을 보이면 국민이 견제세력으로 키우겠지만 반성과 시정의 기미가 안 보이면 다시 한 번 무서운 채찍을 내릴 우려도 없지 않다.” (2008.1.1 동교동 신년하례회에서)
“평생의 민주화 동지를 잃었고, 민주정권 10년을 같이했던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다.” (2009. 5. 23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2009.7.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사를 대신하여)
“민주주의는 나라의 기본입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죽었습니까. 광주에서, 인혁당 사건 등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그 모든 민주주의적 정치가 계속됐습니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2009.6.11,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 연설에서)
조정숙 기자 baboyalove2@nate.com “새 감각 바른 언론” - Copyrights ⓒ경북중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