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환란이 있을 때에는 혹 소모하고 혹 창의해서 마침내 안정토록 하는 것이 상하 각자가 해야할 도리이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안에 발을 내리고 않았음이 이미 두어 해나 되었건만 의리를 좇아서 응모하는 자가 이와 같이 보잘 것 없다. 팔도 안에 참으로 의용과 지략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겠는가, 오백 년 종사의 위태함이 조석에 있고, 삼천리 강토는 강탈당할 염려에 처해 있다. 그윽히 생각건대 궁중에 발생한 변고와 신민의 위급함은 마음이 아프고 뼈가 떨려서 죽고 싶을 뿐이다. 곧 손으로 그놈들의 살을 뜯어먹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위는 하나의 쓸모 없는 유사이다. 지혜와 도량이 본래부터 사람 수효에 참여할 수 없고 간과진오에 대한 일은 일찍이 들은 바도 없었다. 그러니 이 날에 이 일을 일으킴이 어찌 타당하리오만, 충분에 격동한 바되어, 손을 내리고 바라만 볼 수 없기에 기필고 이 도적의 괴수를 소탕코자 하는 바이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같은 소리로 응모하라, 비록 몽둥이와 허리를 가지고도 달려들어 공격해서 용기를 도우면, 적들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정과 촌장이 장정을 거느리고 형세를 도우면 천만다행하겠다.
1896년 3월 28일 (음 2. 15) 허위는 상주와 선산의 유생들과 김산에서의 창의 소식을 듣고 함께 창의하기 위해 김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김산인들이 선뜻 합세를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병들이 김산에 모였을 때 나타날 의병들에 의한 토색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김산에 모여들면 우선 시급한 문제가 군량이었다. 결국 이 군량은 김산의 부호들로부터 수집해야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위·조동석 등 상주·선산인들은 이미 김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산과 개령의 포수가 각기 수백 명씩 명일 새벽 김산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풍설도 돌았다. 이런 과정에서 허위·이기찬 등은 김산인을 제외하고 은밀히 밀담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여중룡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불신감을 더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더욱이 선산과 개령의 포수는 한 사람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1896년 3월 29일 김산에서는 향화를 개최하여 상의하였다. 이 향회는 상주·선산인들이 김산에서 창의했을 때 향권의 침해가 불가피하므로 그 주도권을 옹호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 김산축에서는 여중룡·여영소를 비롯하여 이상설·이숭주·유도일·최동은·이문선 등이 참여하였고, 상·선측에서는 이기찬·허위 등이 참여하였다.
이 향회에서 허위는 여영소에게 함께 창의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서로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그날밤 허위 등의 상·선인들은 자파로 의장과 참모·종사·군관·중군 등의 군직을 정하고 군기고를 기습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김산인들은 군기를 은닉한 후, 하리 백치기를 보내 상·선인들을 설득하였다. 이에 상·선인은 군기고를 닫고 향교로 모였다.
여중룡의 『갑오·병신일기』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반을 먹은 후 명룬당에 자리를 펴고, 여영소는 허위와 더불어 상의를 하여 같이 거사하자는 청을 따랐다. 그러나 내 마음은 불온한 뜻이 있었는데. 대개 손님이 강하고 주인이 약하니 반드시 세력을 빼앗길 폐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을 영소에게 하니 영소가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을의 향응하는 사람도 적으니 어찌 저들의 요청을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한 나라의 거사는 모두가 하나와 같은데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또 한 나라의 거사는 모두가 하나와 같은데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내가 말하기를 “비록 어리석고 졸렬한 소견이지만 반드시 내 말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홀로 말하는 것은 무익할 따름이다.”
아와 같이 김산의진은 창의 과정에서 많은 진통을 꺾었고, 그 진통은 해소되지 않은 채 1896년 3월 29일(음 2. 16) 결정되었다.
◇ 자료제공: 구미 왕산기념관(465-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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