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허위는 1899년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로 남들에 비하면 매우 늦은 정치적 진출이었다. 그가 관직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신기선의추천에 의해서였다.
이점은 하나의 연결고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오히려 황국협회 활동 경험이 더 중요한 계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신기선은 보부상 단체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1898년 12월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동시에 강제 해산되자 1899년 7월에는 황국협회 후신인 상무사의 도사장으로 보부상의 최고지도자로서 역할한 바 있었다.
1899년 3월 9품인 원구단 사제서 참봉으로 관직을 처음 시작한 허위는 같은 달 영희전 참봉 판임과 7등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성균관 박사, 5월에는 소경원 봉사로 있었다. 당시 우국지사 매천 황현의 기록에 따르면 “허위는 선산 사람으로, 그는 불우한 생활을 하면서도 뜻이 고상하여 호언장담을 좋아하고 자신의 경륜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서울에 와서 10여 년 동안 지내던 중 권귀가를 찾아보지 않고 한 객관에 쓸쓸히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영남 사람으로서 서울에서 관리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를 책사로 추대하고 또 어떤 인연으로 대내와 통하여 처음에 그를 참봉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고종의 총애가 날로 높아져서 1년도 안되어 참찬을 임명하고, 또 집을 하사하여 거처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의정부참찬에 임명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04년 8월로 황현의 주장은 일부 착오가 있다. 허위의 초기 관직은 미관말직에 불과하였다.
허위는 1903년 10월 승훈랑에 임명되었다. 그가 고위관직에 오르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 이후부터였다. 즉, 1904년 4월 주차일보공사관 수원 통훈대부, 5월 통정대부, 평리원 수반판사, 8월 평리원재판장, 의정부 참찬, 관제이정소 의정관, 1905년 3월 비서원승 등 6년간에 걸쳐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2∼3년 사이에 허위는 잠시 관직생활에서 떨어져 있게 되는데, 1902년 12월에는 황성시문에 허위와 정인호, 남석구 등이 제국신문사의 어려운 사정과 자금난을 보고 정간을 언급했다는 기서 내용이 며칠 후 다시 황성신문에 누군가가 이들의 명의를 빌어 몰래 신문사에 보낸 것이 확실하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나온다.
◇ 자료제공: 구미 왕산기념관(465-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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