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간 허위의 주요 활동은 일본 제일은행원 유통반대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있다. 제일은행권은 1902년 「제1차여일동맹」이후 한국을 본격적인 경제침략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대한국 정책의 차원에서 발행된 것이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대한제국의 고질적인 백동화 인플레이션 문제와 맞물려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소위 ‘폐제의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한국 정부의 양해와 허가 없이 제일은행권을 유통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보부상들은 일본화폐의 침투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1902∼3년의 제일은행일람불수형 유통반대운동이다.
이를 주도한 기구는 공제소였다.
여기에는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이전 직후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수 차례에 걸쳐 ‘반일토역’ 상소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타파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던 ‘전신시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있었다.
또 하나의 세력으로, 1898년 황국협회의 경험을 갖고 있었던 상무사를 거점으로 한 보부상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공제소는 전국에 제일은행권 유통반대를 위한 방문을 붙이고, 서울의 각지에 경찰대를 파견하여 은행권을 주고 받는 것을 저지하였다. 또한 종로에서 대규모 군중집회까지 열었다.
이에 대해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대한제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고 공제소의 활동을 강력히 금압하라는 공문도 외무대신 이도재에게 보내는 한편 종로의 대중집회를 강제로 해산시키라는 공문을 전달하였다. 거듭되는 항의에 대한제국 정부는 결국 굴복하여 순검을 파견하여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모자 송수만을 체포하였다.
급기야 정부는 1903년 7월 공제소에 대한 완전 해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부가 공제소의 명칭을 철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송수만,허위, 윤이병, 심상희, 김홍제, 이문화 외 수명은 제일은행권 유통저지운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자금을 모집하고 동료를 규합하였다.
나아가 해산령 직후부터 과거 유통권 반대운동을 전개한 경험이 있었던 인천 신상협회와 공조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공제소의 김홍제, 정형기, 정응설, 박기영 등은 같은 달 5일 신상협회에 가서 제일은행권 수수거절을 권유하였고, 동맹연판장에 기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다시 9일에는 인천에서 은행권을 주고받는 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조사하였다.
◇ 자료제공: 구미 왕산기념관(465-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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