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필자가 초임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한적한 시골에 중·고등학교가 병설된 학교였다. 건물은 어수선하여 전쟁 난민촌 비슷했고, 학생들은 비전이 없어 그저 틈만 있으면 놀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 생각한 것이「아침 시간 20분 책 읽기 운동」이었다. 도회지 학교 같으면 아침이나 저녁이나 학교장의 교육 시책이 따로 들어갈 자투리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그러나 시골 학교에 부임하니 귀중한 아침 시간이 그냥 웃고 떠드는 시간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전 직원의 동의를 얻어 아침 시간 20분을 학교 구성원이 모두 책을 읽는 시간으로 정했다. 교장은 교장실에서 교직원은 각자의 책상에서 담임과 학생은 교실에서, 준비해 온 책을 읽되 숙제를 하는 등 책을 읽는 외의 다른 일은 하지 못하게 했다. 교실 뒤에 각자의 읽은 책 쪽 수를 자신의 양심껏 막대그래프로 그려 넣게 하고 매월 말에는 다독상 시상을 하였다.
그 결과 첫해의 연말에는 그 시골 학교에서 10,000쪽을 독파한 학생이 4-5명이나 나오게 되었다. 다음해엔 1학기 말이 되자 10,000쪽 독파 수상자가 꾀나 나오게 되었고 그 해 가을엔 도교육청 주최 화랑문화제의 백일장 부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수상하는 학생까지 나오게 되었다.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인 학생들의 생각과 생활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독서의 중요성은 삼척동자라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시행하려면 독실(篤實)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시간을 따로 내어야 하고 읽을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시작하는 것 자체가 번거롭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독서의 참맛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독서의 즐거움에 매료되고 나면 모든 변명은 사라지게 된다.
2011년 정치계의 화두는 ‘복지’라고 할 만하다. 이를 두고 정당들은 벌써 내년의 선거를 염두에 두는 가운데 논쟁이 뜨겁다. 한 쪽에서는 증세(增稅) 없이도 무상 복지가 가능하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급식 복지, 의료 복지, 보육 복지에다 반값 등록금 복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복지 정책을 시행하려면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하며 결국 그것은 세금으로 조달해야 하니 엄청난 증세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한 쪽에서는 우리의 미래가 복지로 가는 것이 마땅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부(國富)를 쌓지 않은 데서 복지부터 시행하면 오늘날 서구 선진국 중 적지 않은 나라들처럼 결국은 국가가 파산의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걱정한다. 더 나아가 복지란 결국 누군가가 내는 돈으로 시행하는 것이니 무상(無償)이란 용어 자체가 맞지 않다고도 한다. 모두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모두가 맞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만큼 사안 자체가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보도를 보면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올해 무상급식비 1,162억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2007년부터 시행해 오던 독서 교육비 2억원을 삭감하기로 했다 한다. 모르긴 하지만 다른 쪽의 예산들도 상당한 부분들이 무상 급식 쪽으로 전용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서울시의 일이지만, 증액되는 예산은 없고 전체 보따리는 일정한 가운데서 새로운 시책을 당장 시행하기 위해서 기존의 시책을 삭감하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시책이라 하더라도 다른 한 쪽에서 무리가 따를 것은 불문가지이다.
결코 무상급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시행하는 일은 그렇게 발등의 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상위권 학생들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유상급식을 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인데 이미 배정된 예산까지 전용해 가면서 밀어붙여야 했던가? 더욱이 독서는 보이지 않는 영(靈)의 양식이니, 보이는 육(肉)의 양식을 채우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영의 양식을 삭감해 버린 셈이다.
어느 양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는 판단의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나, 무엇이 그렇게 예산을 전용(轉用)해 가면서까지 급하게 밀어붙일 일이었던가? 서울시교육청의 정책 입안자들은 독서의 중요성을 몇 등쯤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는 독서교육의 효과보다는 금방 효과가 드러나는 무상급식의 시행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은 아닌가?
교육은 투자다. 무상 급식은 교육의 일환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시행한 교육의 열매는 한 세대 후에나 그 열매의 값을 얻을 수 있는, 긴 기다림이 필요한 투자다. 교육은 결코 우선 먹기에 맛이 단 곶감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광복 이후 6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세계 최빈국의 전쟁 난민촌으로부터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세계 7대 경제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교육의 힘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앞 시대의 현명한 리더들이 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적은 예산을 쪼개어 가며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이제 그 때 기른 인재들에 의해서 나라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개 가정사(家庭事)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하물며 서울시와 같은 거대 자치단체에서 이미 배정된 예산까지 전용해야 한다면 전면적 무상급식은 다음해에 예산을 확보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고, 부득이해서 꼭 시행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면 그 우선순위에 대하여 더 오랜 시간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았을까.
서울시의 예산 문제를 구태여 이 자리에서 들먹이는 것은 여타의 다른 지방자치단체 의회나 집행부서에서도 마땅히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일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세금을 집행할 때에는 특정 정당의 이념이나 유·불리를 떠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국가의 발전에, 그리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의 기준에 부합할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민정 기자 day@nate.com “새 감각 바른 언론” - Copyrights ⓒ경북중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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