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마지막 정치작업을 감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8월 1일부터 보름간에 걸쳐 서울의 시위대와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 진위대 등 대한제국의 정규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국망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로 야기될 수 있는 한국군대의 반말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다.
일제는 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에서도 보유하고 있던 일체의 무기류를 압류하는 조척인 ‘총포급화약류단속법’을 군대해산에 뒤이어 9월에 감행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 걸쳐 비무장화를 실행한 연후에 병탄을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가, 특히 광무황제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이 한국민의 대일 적개심과 항일기운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고, 그결과 전국민이 대일전에 동참하게 되는 구국의 성전 의병전쟁으로 승화되었다.
2)허위의 재기 항일전
허위는 1907년 중반기에 진행된 일련의 국권침탈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고 또 좌시하지도 않았다. 전국적으로 확대 고조되고 있던 의병전쟁에 참전하여 그 선봉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허위는 1907년 9월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지인 연천과 적성, 그리고 철원 일대를 무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재야의 우국지사였던 매천 황연도 그의 『매천야록』에서 “전참잔 허위가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민긍호, 이강년과 상응하여 병성을 크게 떨치었다” 고 기록하였다. 허위는 주로 연천, 적성, 철원, 파주를 중심으로 양주, 개성, 삭녕, 안협, 토산, 이천 등지에 이르기까지, 곧 경기 복부와 황해 남부, 그리고 강원 동북부 일대에 걸치는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 일대를 폭넓게 전전하면서 허위는 의병을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하는 한편,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또 친일매국노들을 소탕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곧 재기 이후 허위가 활동한 중요지역은 임진강과 그 상류인 한탄강 유역으로, 오늘날의 중서부 휴전선 일대였던 셈이다.
허위가 이처럼 재기무대로 경기 북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선택한 이유와 동기가 무엇인지 자료상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자료제공: 구미 왕산기념관(465-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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