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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가 낳은 최고의 항일독립운동가 임은동 출신 “왕산 허위”
왕산의 후손들 100년 동안 방랑자 신세
역사적 계승 작업 서둘러야
2006년 10월 02일(월) 03:18 [경북중부신문]
 

ⓒ 중부신문
 왕산 허위 선생은 1855년 4월1일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했다. 일제와 맞서 싸운 최고의 독립운동가로서 1908년 9월 27일 서대문 형무소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교수형을 당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제1호를 추서받은 왕산 선생의 고향이 바로 구미인 것이다.
 하지만 왕산 선생의 순국 이후 100년 가까이 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계승작업은 미미해 안타까움을 남겼고, 1908년 왕산 선생의 순국 이후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가족과 후손들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으로 떠도는 방랑자 신세로 전락해야 했다.
 더욱더 불행스러운 것은 이들 독립 투사의 후손들은 광복된 이후 마땅히 이 나라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역의 산하에서 일제강점기나 다름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1995년 금오공대 부설 선주문화연구소의 학술발표 대회 및 논문집발간으로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왕산 허위 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작업은 이후 2003년 전쟁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된 9월의 호국인물 선정기념 현양행사, 2004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주최의 1월의 독립운동가 선정기념 공훈 선양 기념식에 이어 구미시와 구미시의회, 구미문화원, 허호 전 구미시의회 의원을 비롯한 허씨 일가의 노력에 힘입어 2004년부터는 왕산 선생의 역사적 사실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구미를 중심으로 구체화 되었다. 현재는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기념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 올 7월 들어서는 이역만리 키르키스탄에서 망향의 설움을 곱씹으며 떠돌이 삶을 살던 허씨 일가족 8명이 방송과 언론인, 작가 및 종교단체와 독지가, 임은동의 허씨 일가의 노력에 힘입어 영구 귀국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일제 탄압을 피해 망명길에 오른지 90여년, 1945년 광복 이후 60여년 만의 일이었다.
 일제 탄압을 피해 망명길에 오른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광복된 나라에서조차도 배척받는 현실,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푸대접을 받는다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는 양식있는 국민들의 탄식을 우리 모두가 가슴깊이 새겨놓을 필요가 있다.

 “의병을 일으키게 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 대장은 누구인가.”
 왕산 선생에게 일본군 재판관은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등박문이요, 그 대장은 나다.”
 재판관이 다시 물었다.
 “ 어째서 이등박문이라고 말하는가.”
 허위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그가 원흉이 아니냐.”
 그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고, 서대문 교도소에서 최초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흔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때 왕산을 기리며, 왕산 같은 충정과 기상을 다른 동포들이 가졌다면, 일제의 침략을 물리칠수 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855년 4월 1일 임은동에서 태어난 왕산 선생은 1908년 9월27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기까지 50여년의 생애를 오로지 기우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살다간 열혈 애국자였다.
1896년 3월 김천에서 의병을 규합, 성주와 충청도에서 활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항일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왕산 선생은 1899년 3월 이후 5년간 평리원 재판장과 의정부 참찬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왕산 선생이 항일운동에 적극 나선 것은 1905년, 일본만행 규탄격문 살포로 4개월간 투옥된 이후 김천시 지례면 삼도봉 아래에 연금 되면서였다.
 왕산 선생이 그곳을 벗어난 것은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 일대의 의병장들을 만나 국권 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경상도 의병장 전환식에게 2만냥의 군자금을 대어주고 , 유인석과 만나 국권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곽종석, 현상건등과 함께 대응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마침내 1907년 4월, 창의하라는 고종황제의 밀명이 내려졌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불같이 봉기하던 무렵이었다.
 왕산 역시 경기도 연천에서 김태묵, 왕희종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항거했다. 그의 부대는 포천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고, 철원읍 점령을 시도했으며, 친일파를 제거하기도 했다. 왕산은 무장 투쟁 이외에도 대한 매일신보에 격문을 게재해 무장투쟁과 선전활동을 통해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고, 각국 영사관에 일제를 고발했다. 왕산 선생의 부대는 날로 세력이 증가하여 1907년 12월 무렵에는 병력이 수천명에 달했다. 특히 이들의 활동은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 지역이어서 일제에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가장 뛰어난 것은 서울 진격작전, 1907년 11월, 전국 13도 의병장들이 통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경기도 일대에 집결했다. 당시 병력의 숫자는 48진 1만명, 왕산선생의 병력은 2천명에 가까웠다. 이 당시 왕산 선생은 전국 13도 의병장과 연합해 13도 연합의병창의군을 결성하고 한말의 항일의병장 중 최고 지도자인 13도연합 창의군 군사장이 된다.
 이후, 창의군은 경기도 양주에 모여 작전을 세우고, 활동을 본격화 했다. 왕산부대는 마전읍을 점령하고, 헌병대를 섬멸했으며, 서울로 진격할 준비를 마치고, 총 38회의 전투를 치르며 동대문 밖 30리까지 도착했다.
 의병연합부대의 목표는 일제 통감부를 타격하고, 그들과 담판을 지어 을사조약과 을미칠조약을 파기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국노를 처단하고, 신정부를 수립해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당시 왕산선생의 이끌던 진격부대는 300여명, 당시로는 가장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분군에게 의병 300명이라는 숫자는 무의미해 보였다. 그러나 왕산은 개의치 않고 접전을 벌였고, 예상대로 실패했다.
 이후 왕산은 임진강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다시 한번 서울 진격기회를 노렸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 북부수비대를 서울로 불러들이고, 일본에 있던 제6사단과 7사단 병력까지 불러들였다.
 1908년 여름, 서울과 경기도 일대는 이들이 벌이는 전투로 날마다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산의 병력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근대식 무기와 현대식 무기와의 싸움인데다 그나마 의병들은 총알과 탄약마저 부족했다.
 의병들은 이런 단점을 구국에 대한 열망으로 극복해야 했다. 1908년 5월 왕산이 주도한 2차 서울 탈환 작전이 실패한 것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수 없는 현실의 벽 때문이었다.
 왕산이 헌병에 체포된 것은 그해 6월이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것은 체포 3개월후인 9월 27일이었다.


 구미 임은동 왕산 일가는 왕산 순국 후 7년만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10여가구가 고향을 등지고, 만주 간도로 야반도주해야 했다.
 이들은 만주로 가서도 항일운동에 앞장서다가 일제에 쫓겼고, 형제들은 흩어져서 집시처럼 유랑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왕산의 동생인 성산은 망명 조선인의 자치단체인 부민단 초대 단장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하고, 왕산 아들 허학은 동흥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를 길렀으며, 당질인 허형식은 항일을 하기위해 동북항일연군의 총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왕산의 막내 아들인 허국은 만주에서도 일본군경 등살에 견딜수 없어 소련 연해주로 피신을 해야 했다. 이후에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중앙아시아로 겨났다. 만리 타향 이국 땅에서 망향의 그리움을 씹으며 살았던 허국은 한,러수교 전이어서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고국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곳에 묻혔다.
 이후에도 왕산 유족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야 했다. 왕산의 손자로 1951년생인 허 블라디슬라브의 경우 지질학자로 일하다가 소련 붕괴후 낡은 트럭운전사로 연명할 정도였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국한 최고의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실상은 참으로 참담했다.
 다행스럽게도 이국만리에서 떠돌던 이들은 100년만에야 조국을 찾을수 있었다. 왕산선생의 손자인 허블라디슬라브씨가 지난 2005년6월 영구 귀국하게 된것.
 그러나 100년만에 조국을 찾았지만 이들 허씨와 가족들은 당장 끼니를 잇기 위해 경기도 안성등지로 흩어져 공장일을 해야 했다.
 이러던 가운데 허씨 가족의 딱한 사연을 접한 익명의 독지가가 38평짜리 아파트를 무상으로 빌려주면서 새보금자리를 마련했고, 한국말을 할줄 모르는 허씨 자녀들이 영구정착을 위해 한국말을 배우려고 한다는 소식에 고려대가 1명에 대해 지원을 약속했고, 소망교회는 왕산 선생 자손들이 한국에서 공부할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하겠다며, 1천6백만원을 지원, 고려대 한국어문화센터에 입학하게 되었다.이와함께 허씨 일가족 8명은 지난 7월 꿈에도 그리던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또 지난 9월 24일 우즈베키스탄 공식방문에 나선 한명숙 국무총리는 망국의 한을 안고 70여년을 외롭게 살아온 비운의 독립군 자손 허로자(80)씨를 특별초청해 추석전에 한국을 방문한다.
 허씨는 왕산 허위 선생의 손녀이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펴다 옥고를 치른 왕산의 장남 허형(1887-1940)의 둘째딸로 왕산 직계 후손 중 최고령 생존자이다.
 이밖에도 왕산 선생의 후손으로 북만주 웃막에서 태어난 허도성 씨는 친일파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며 미국으로 이민, 서러움을 달래며 살고 있다.
 왕산 허위 선생등 일가들은 항일독립운동가로서 평생을 살다간 애국자들이 대부분이다. 이육사의 어머니도 왕산 선생의 일가이다.
김경홍기자 siin0122@hanmail.net
김차옥 기자  ch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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