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러일전쟁 만주 봉천회전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고 봉천을 점령한 날이었다. 이 기간허위는 외교적 교섭방법으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학진, 이일직과 함께 서울 주재 각국의 공사에게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침략을 규탄하는 한편 대한제국의 독립을 각국이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통역관을 통한 최우통첩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는 다음날 3월 11일 아침 최익현과 허위, 판서 김학진 등을 남대문 창동 병참사령부로 이송하여 잡아가두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이때 하세가와가 이들이 일본을 비난 배척한 것을 힐책하자 최익현과 허위 등은 황제를 위하여 바른 말로 간하는 것은 하늘의 성정에서 나온 것인데 왜 협박하느냐고 도리어 큰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일본 헌병들은 허위의 집을 수색하여 문서 등을 합수해갔다. 이렇듯 일본측이 대한제국의 반일고위관료들에 대한 체포와 가택수색에 들어가자 정부에서도 강력히 항의하였다. 11일 외부대신 이하영은 일본공사에게 최익현의 상소가 설혹 시의에 합당치 못한 것이 있더라도 채납 여부는 모두 한국황제가 결정할 것인바 한국정부의 처분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일본군이 함부로 잡아가두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라고 강경히 항의하였다. 동시에 최익현, 허위 양인을 즉시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대한제국 정부를 계속 압박하였고 결국 이에 굴복한 정부도 ‘배일운동으로 한성의 치안을 방해’한 혐의를 물어 12일 허위의 비서원 승지 직책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국권의 무력화와 연이은 대관들의 강제연행, 구금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었고, 더불어 반일의병 봉기도 새로운 각도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이에 외부대신 이하영은 13일과 14일 하야시에게 다시 조회하여 일본군이 최익현과 허위, 김학진을 석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여론이 더욱 시끄러워지고 따라서 양국의 국교도 결렬되고 있다고 하면서 이들을 즉시 석방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거듭되는 외부대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13일에는 일본을 비난한 혐의로 일본헌병이 이세직을 잡아갔다.
김학진은 며칠만에 석방되었지만 최익현과 허위는 오랜 기간 구금되었다. 그러다가 허위는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병이 심해져 만 4개월 여 만인 7월 13일에 석방되었다. 일본사령부에서 석방되었던 날 그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 자료제공: 구미 왕산기념관(465-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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