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이우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이 이르기까지 더욱 거세어진 일제의 한국침략은 허위로 하여금 다시 대일전쟁의 선봉에 서게 만들었다.
허위는 그간의 항일행적이 빌미가 되어 1905년 1월 일제 헌병대에 구금되기에 이르렀다. 며칠 뒤 그는 의정부참찬을 사임하고 석방되었다.
2개월 후인 3월 2일에는 다시 비서원승에 임명되었으나, 항일투쟁의 전력을 두려워한 일제는 의정부 찬정 최익현, 시종원경 김학진 등과 같이 3월 11일 재차 허위를 구금하였다.
구금하기 전에 일제로부터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자,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며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최익현과 김학진 양인을 석방한 뒤에도 일제는 그를 4개월 동안이나 더 헌병사령부에 구금하였다. 그러나, 허위는 일제의 이러한 탄압에도 조금도 굴함이 없었다.
이에 일제는 하는 수 없이 7월 1일 헌병의 감호하에 그를 강제로 귀향 조치시켰다.
허위는 그뒤 경상, 충청, 전라3도의 도계인 삼도봉밑의 지례 두 대동에서 일제 관현의 감시하에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월에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의 강제체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허위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등 전국을 돌며 각지의 둥지, 지사들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을 모색하였다.
영남의 저명한 유학자인 면우 곽종석, 군부의 실제 중 한사람 이였던 참장 이학균, 전기의병을 주도하였던 유인석 의병장 등이 당시 그가 만났던 인물들이다. 허위가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주요 지사들과 만나 협의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제침략으로부터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강구하였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된다.
나아가 그가 얼마 후 의병을 재기하는 일에도 일정한 상관성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즈음 경북 영천의 저명한 의병장 정환식에게 2만 냥을 주선해 주기도 하였는데, 허위의 항일사상과 행동으로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07년 6월 헤이그말사의거를 기화로 삼은 일제는 그해 여름에 한국 병탄을 목전에 둔 일련의 강력한 침략정책을 강행하였다. 헤이그밀사들의 구국활동 소식을 들은 일제는 곧 한국병탄을 결정하고 이등박문으로 하여금 일련의 대한침략정책을 선두에서 지휘하게 하였다. 7월 20일 정마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마지막으로 장악한 뒤, 7월 24일 급기야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융희황제를 즉위케 하였다.
한국민의 절대적 구심체이며 반일투쟁의 정점인 광무황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강제병탄을 시도하기가 어려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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