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헌병에게 체포당한 허위는 곧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허위는 의병 탄압의 최고 지휘자였던 헌병사령관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으로부터 직접 신문을 받게 되었다. 비록 체포된 몸이었으나, 허위는 조금도 굽힘이 없이 일제의 침략상을 성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국권회복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피력하였다. 허위는 의병을 일으키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한국을 멸할 흑심을 가졌다. 우리들이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곧 일제의 한국침략을 좌시할 수 없어 구국의 대열에 동참하였으며, 국권수호와 일제축출, 이것이 바로 의병을 일으킨 동기이자 투쟁목표라는 것이다. 일제의 대한침략이 곧 의병을 일으킨 기인(基因)임을 명쾌히 설파하였다.
이러한 허위의 주장에 대해 명석(明石)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이 한국에 임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팔다리와 신체를 주무르고 두드리면 일견 병자를 고통에 떨어뜨리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마침내는 병자의 병은 낫게 될 것이다.
즉 일제의 한국 침략이 일시적으로 한국민에게 고통을 가져올지 모르지만, 종국적으로 보면 한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하게 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명석(明石)이 편 것이다. 이에 대해 허위는 다시, 겉은 붉지만 속은 남색으로 된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이 연필을 보라. 일견 붉은 색이지만 그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한 것이다.
허위는 이처럼 일제 침략의 기만적 속성을 두 가지 색으로 된 연필에 비유하여 명쾌하게 논파하였던 것이다.
허위를 심문하던 명석(明石)은 그의 고매한 인격과 강직한 성품에 감복하여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존경하였고, 심지어는 그의 구명운동까지 벌였다고 전해진다. 명석(明石)이 뒷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허위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논찬(論贊)한 구절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몇백 몇천의 의병장 가운데서도 열력(閱歷)과 성망(聲望)이 뛰어나고 한학에 조예가 깊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밝아 중민(衆民)의 섬기는 바 되어 이르기를 선생(先生)의 경칭(敬稱)으로 대한 사람이다.
일제측의 최고 사령관이던 명석(明石)조차도 허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인격과 덕망에 감화를 받아 그를 ‘선생(先生)’으로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뒤 허위는 1908년 9월 18일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1일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형이 집행되기에 앞서 왜승(倭僧)이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읽으려 하자, 그는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대성일갈하며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또 한 검사가 그에게 사후 시신을 거둘 이가 있느냐고 묻자,
죽은 뒤의 염시(念施)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이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
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일생 동안 구국의 일념을 견지하고 항일투쟁으로 일관하였던 허위는 54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l0월 13일 이강년 의병장이 교수형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데 이어 허위마저 순국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형무소의 한인 압뇌(狎牢) 두 사람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모자를 찢고는 즉시 사직하였다고 전해진다.
뒷날 대한침략의 괴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단한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심문과정에서 허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겨 후인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허위씨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勇猛)의 기상이 동포 2천만민에게 있었더라면 오늘의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관(高官)은 자기 생각만 하고 있고 나라 있음을 모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관 중에 충신이라 할 수 있다.
허위 사후에 이병채와 김규식, 그리고 권중설, 고재식 등의 부하 의병장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의병투쟁을 지속으로 펼쳤다. 이병채와 김규식은 그뒤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만주 독립군의 핵심간부로 변신, 무장항일투쟁을 지속하였으며, 권중설과 고재식은 국치 직전까지 장기지속적으르 항전을 전개하였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910년 3월 13일 적성 헌병분견소에 체포된 권중설과 고재식 양인은 허위 사후에 창의원수부대장이 되어 휘하 의병들을 김천일과 이인용 등에게 위임하고 포천지방에서 이들 의병을 지휘하고 또 징발문을 발포하면서 마지막까지 혼신의 사력을 다해 항전을 벌였다.
◇ 자료제공: 구미 왕산기념관(465-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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