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용 구미시청 담당이 발표한 향토자료인 민간 목활자 선산자에 대한 연구 결과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
2005년 05월 24일(화) 03:20 [경북중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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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註〉
목활자(木活字)는 활판 인쇄를 하기위해 나무에 새겨 만든 각종 크기의 활자를 말한다. 목활자에 대한 동양에서의 최초의 기록은 북송(北宋)의 심괄(沈括)이 지은 몽계필담(夢溪筆談)의 판인서적(板印書籍)조에 보인다. 그러나 목활자의 사용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300년 원나라 왕정(王禎)이 역은 농서로 그 책 끝에 조활자인서법(造活字印書法)이라는 제목으로 목활자 인쇄절차에 대한 소상하게 설명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의 목활자 인쇄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언제 시작하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전해오고 있는 고려 우왕3년(1377)의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를 면밀히 조사해 볼 때 부족한 글자를 목활자로 충당하고 있어 이미 그 이전부터 목활자가 인쇄되어 쓰여 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금속활자로 인쇄할 때도 벽자와 부족한 글자를 손쉽게 나무에 새겨 보충 사용했던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목 활자본으로 볼 수 없다. “목활자본”(木活字本)이란 인본에 사용한 활자가 모두 목활자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최초의 목활자 인쇄물로는 조선태조4년(1395) 및 동왕6년(1397)에 인출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 이라는 문서이다. 목활자의 제작방법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는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서유구(徐有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등이 있다. 목판에는 관판(官板)과 사판(私板)이 있으며 사판에는 크게 나누어 사찰판과 서원판, 사가판으로 구별할 수 있다. 사가판은 가문을 중시하는 풍조가 활성화해짐에 따라 선조들의 문집을 간행하여 가문을 빛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성행되었다. 사가판에 속하는 민간 목활자 인쇄는 영남, 호남에서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목활자로 간행된 책의 종수는 천여종이 넘게 추산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판본 중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쇄사 및 출판사 연구 자료로도 중요한 위치에 차지하고 있다. 인본에 실린 기사들 중에는 우리 역사의 귀중한 기록의 하나로서 영구히 보존되어야할 것들도 있으며 당시의 사상이나 사회적 배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목활자는 1960년까지 오래 동안에 인쇄, 출판 되었다. 주로 목활자의 재질나무는 회양목, 돌배나무, 감나무, 박달나무, 단풍나무, 모과나무, 산벚나무, 피나무, 사철나무 등을 주로 사용하였다.
〈본 론〉
선산의“이봉영목활자“(李鳳榮木活字)및 인쇄소는 1908-1940년에 인쇄를 했으며 주로1920-30년대에 집중적으로 출판을 했다. 경상북도 구미시(舊, 善山郡) 장천면(長川面) 오로(五老) 1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로서 토지는 비옥하며 오로저수지가 있고 산수가 어우러진 아늑하고 뒷산에는 참나무가 무성하며 경치가 좋다.
서쪽골짜기에 자연부락 설골(雪谷)혹은 설동(雪洞)은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의 집성촌이 있다. 마을입구에 200년 정도의 버드나무가 버티고 있어 고풍스럽다. 조선전기의 문신인 좌리공신양평공(佐理功臣襄平公)이며 한성부판관, 평안서도절도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호조판서, 좌참찬,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한성부판윤을 역임한 이철견(李鐵堅 1435-1496)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영모각(永慕閣)이 있고, 그 좌측 언덕아래에 조선조 학자 이희원(李希元)을 추모하는 명암재(明庵齋)가 그 들을 추모하고 있다. 그 문중의 양평공(襄平公)의 14세손이며, 장천 오로리 입향조 명암공(明庵公) 이희원의 11세손인 큰 선비인 이봉영과 아들 이규진(李圭眞)부자(父子)가 쓰고, 각자하여 목활자본(木活字本)을 만들어서 책을 인쇄및 간행한 사실이 있다. 각수(刻手)는 이봉영이며 발행인쇄소의 명칭은 설산당(雪山堂)으로서 학동을 가르치는 서당도 운영하였으며 한약, 의술 공부도하여 한약방과 겸해서 인쇄업도 같이한 것이다.
가계는 장천면 오로리 1383번지 李大奎 - 李遇起 - 李裕完 - 李鳳榮(1876년생) - 李圭眞(1900년생) - 李鍾健(1925년생) - 李德雨(1948년생)으로 이어졌다. 이봉영의 자(字)는 문욱(文郁)이며 이유완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이규진은 장남으로 태어나고 자(字)는 원보(元甫)동생 규순(圭淳), 규용(圭溶)이가 있다. 이종건은 장남이고 동생 종숙(鍾淑), 종운(鍾運)이가 있다.
이덕우씨는 아버지를 따라 어린나이에 일찍 대구로 출향하였다. 지금은 이 마을에 이규진씨의 둘째 자부만 살고 직계 후손은 없고 방계의 후손들은 많이 사는 동족 집성부락이다. 이봉영, 이규진 부자(父子)는 목활자를 쓰고, 각(刻) 까지 하여 인쇄도하며 책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인본으로는 오로리에 거주하는 경주이씨파보(慶州李氏派譜)와 낙남집(洛南集)등 많은 문집을 인쇄 및 간행했다. 경주이씨파보에는 직접 서문(序文)도 쓰고 직접 족보를 만들었다.
그 당시 선산(善山) 지방에는 유일한 각수(刻手)며 목활자 인쇄업이었다. 1900년대 민간목활자 인쇄업은 경북지방에도 몇 개소가 없었다. 현존 학계에서 알려진 목활자는 첫째, 조성연대가 19세기말경에 영주시 이산면 신씨목활자(申氏木活字) 둘째, 조성연대가 미상인 안동시 임하면 고곡동 임씨목활자(林氏木活字) 셋째, 조성연대가 1910-1930년대 사이로 추정되는 상주시 은척면 동학목활자(東學木活字)가 있다. 그리고 1908-1940년대에 선산 장천 오로리 “이봉영목활자”(李鳳榮木活字)가 있었다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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