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파(雲坡) 최관호(崔觀浩 1905∼1946) 선생 추모제가 지난 8일 서거 70주년을 맞아 구미시 해평면 쌍암고택 주변에서 열렸다.
이번 추모제는 운파최관호선생추모사업회(회장 최열), 해평면 노인회, 해평리 노인회, 전주최씨 인재공파 해평문중 등의 주최로 진행되었다.
운파 최관호는 16세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일선지(一善誌)를 저술하신 인재(齋) 선생 최현(崔晛)의 13세 주손(孫)으로 태어나 약관 20대 초반인 1925년 구산구락부(龜山俱樂部) 창립을 시작으로 구미 선산의 청년운동과 지역사회의 진보를 이끌면서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최관호 선생은 지난 1927년 신간회 선산지회 창립을 지원했고 1927년 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대학에서 잠시 수학했으며 1929년 만주의 북방 하얼빈에서 사재를 들여 만몽일보(滿蒙日報)를 발간하면서 신문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30년 8월 대구 조선은행폭탄의거의 주역인 장진홍(張鎭弘, 1895∼1930) 선생이 옥중에서 자결하자 만몽일보에 중한 양국의 공동항일전선 구축을 촉구하는 “민족이여 각성하라”는 사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 사설로 인하여 최관호 선생은 일제 경찰에 의해 하얼빈에서 피검되어, 국내로 강제 송환된 후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뒤에도 선생은 1931년 해평수리조합 반대운동의 중심에 서서 끝내 이를 저지했고 농민의 경제적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해평소비조합에 참여하는 등 1930년대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강점기 때 국내에서 결성된 최대의 항일조직인 신간회가 해산되자 1931년 대부분 신간회의 지역간부로 활동하던 경북도 내의 기자들로 결성된 ‘보도협조망’에 선산군 대표로 참여했고 1934년부터 동아일보 선산지국의 기자로 활동했다.
1944년 서울에서 여운홍(呂運弘, 1891∼1973),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에 의하여 비밀리에 건국동맹 결성이 추진되자 경북에서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선생을 중심으로 연계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최관호는 이에 참석했다. 건국동맹 결성이 드러나면서 심산 김창숙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과 함께 1945년 8월 7일 왜관경찰서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으나 정국은 좌우의 극단적인 이념대립과 민생파탄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최관호 선생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46년 10월 16일 군인들에 의하여 강제연행 되었고 다음날 오전 해평지서 앞 농창(農倉)에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되었다.
한편, 최관호 선생이 처형된 지 1 시간도 안 되어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 1893∼1969)으로부터 그를 즉각 석방하라는 급한 연락이 있었으나 이미 사태가 끝난 뒤라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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