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쉬겐트의 번화가인 브로드 웨이에서 본 티모르 왕의 동상은 인상적이었다. 강성제국을 건설하면서 영화를 누린 왕은 질곡의 세월을 지켜보면서 온몸에 깊은 상흔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쉬겐트 법대와 법원이 나란히 서있는 이곳에는 그림과 골동품 거리로 넘쳐났다. 고객을 찾는 상인들 속으로 빨려들어간 필자의 눈에 이색적인 교통신호체계가 들어왔다.
타쉬겐트 사거리는 직진표시만 되어있고, 좌회전 신호나 횡단보도 표시는 없었다.
타쉬겐트 체류 4일째인 3월5일 아침, 창공에는 검은 까마귀떼로 가득했다. 멀리서 어둠을 거두며 흘러오는 닭울음소리가 이 도시의 새벽을 일깨우고 있었다. 70년대를 힘겹게 살아온 새마을 시대를 문득 연상시켰다.
햇살은 가장 먼저 숙소옆에 자리잡은 학교로 쏟아졌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가 10년인 교육제도, 그 후에 대학으로 진학하는 이 나라의 제도는 구 소련의 잔영이었다. 사회곳곳에서 베어나오는 구 소련의 잔영이 가슴을 미어뜨렸다.
타쉬겐트의 아침은 우리의 70년대를 빼어닮고 있었다. 우유배달업자가 대문 밖에서 주인을 부르면 플라스틱병을 들고나와 우유를 사고 그 자리에서 현금을 지불하는 식이었다.
티모르 제국을 건설한 티모르 왕의 무덤이 있다는 사마라칸트로 가는 도로변에는 상점과 식당이 즐비했다.
그러나 속내는 그야말로 속빈 강정이었다. 진열상품이라고 해봐야 음료수 몇병과 몇종류의 과자가 고작이었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노상의 식당은 빵과 소고기, 양고기를 진열해 놓고 길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는 이곳에서 소,닭, 돼지고기 바비큐와 이 나라 국민의 주식인 빵을 주문했지만, 특이한 향과 양념의 맛 때문에 먹을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문화적 차이는 있는 것이겠지만, 7일여의 체류기간 동안 음식은 내내 필자를 괴롭혔다.
벼랑의 위기에 몰린 이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인식은 아주 낮았다. 하기야 우리에게도 보리고개가 있었고, 허리가 휠정도인 당시에는 복지나 문화를 돌아볼 여유가 있었는가. 15-17세기 경에 세워져 한때 이슬람대학으로도 사용되었다는 건물내에는 파손되고 찌그러진 유물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늘 끝에 서있는 것처럼 아스라이 서 있는 기념상품 가게들, 먹고 살기가 힘겨운 이들은 오로지 앞만 보고 가는 중이었다.
강성제국을 건설한 티모르 왕릉도 예외는 아니었다. 5불의 커미션을 내면 지하무덤에서 사진촬영이 가능했다. 하루살이조차 힘든 이들에게는 관리와 보존이 엉망인 2500년 전통의 역사까지 무시되고 있었다.
타쉬겐트에서 사마라칸트까지는 5시간 정도였다. 쭉쭉 뻗은 직선도로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도로와 평야는 전혀 개발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 경제 척도를 읽을 수 있게 했다. 이 속에서 본 재래시장은 가슴을 저미게 했다.애기를 안고 동냥을 하는 주부들이 귀찮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보리고개라는 질곡의 아픔을 필자 역시 간직한 채 오늘까지 걸어오지 않았던가.
경찰의 자세는 그나라 정치의 현주소를 읽게 해 준다. 담배를 물고 검문을 하거나 제멋대로 수신호를 보내는 이 나라 경찰을 보면서 한국 경찰이 민주적임을 새삼 깨우칠 수 있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이 나라의 경찰은 채용에서부터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우즈베크 본토인이 아니면 채용조차 안되는 현실, 다민족으로 구성된 이곳에서도 민족차별은 존재하고 있었다.
대통령 역시 무소불위였다. 대통령이 출퇴근하는 아침과 저녁이면 30분 동안 모든 차량은 서 있어야 한다.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는 권위주의 체제, 한사람의 권위 때문에 우즈베크 중심부는 하루에 두차례씩 극심한 교통혼잡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다보니 교통이 불편한 중심부에서 사는 것을 기피했다. 공급은 많으나 수요가 없어 아파트 값은 매우 저렴하다고 했다.
천장부지로 치솟는 강남의 현실이 현기증을 일으키며 필자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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