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인성 관련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冒頭(모두)에 모 강사께서 우문현답 문제라며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높은 학위가 무엇’인지 물었다. 수강생들이 한동안 웅성거렸지만 강사가 요구하는 정답을 찾지 못했다. 한참 후에 강사께서는 학위의 위계를 재미있게 부언 설명까지 하였다. 학사 위에는 석사, 석사 위에는 박사, 박사 위에는 남에게 밥을 자주 사주는 밥사, 그 위에는 술을 잘 사주는 술사, 술사 위에는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옷을 기부하는 衣士(의사, 옷 의), 의사 위에는 남을 위해 재산이나 재능 기부, 노력 봉사 등을 하는 최고의 학위인 ‘봉사’라고 하여 한바탕 크게 웃고 넘어간 일이 있었다.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었다.
전남 구례에 있는 ‘雲鳥樓(운조루, 중요민속자료 제8호)’라는 고택은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 운조루는 영조 52년(1776년)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柳爾冑(류이주)선생이 지은 집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의 집이다. 이 집은 ㅡ자형의 하인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T자형 사랑채, ㄷ자형의 안채가 있고 대문 안의 행랑채가 서로 연이어져 있고 안채의 뒷면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고택 자체보다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헛간에 놓여 있는 뒤주(쌀독) 때문이다. 이 쌀독은 통나무를 파내어 위쪽에는 덮개 모양의 문으로 입구를 만들고 아래쪽에는 사각형 판자에 구멍을 뚫어 출구를 내고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자를 새겨져 놓았다. 타인능해란 ‘다른 사람이 능히 열어도 된다 즉, 뒤주가 개방되어 있으니 누구든지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원통형 나무 독에 쌀을 채워놓고 마을에 가난한 사람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열고 쌀을 가져가서 밥을 짓도록 하였다. 원통형 쌀독 바로 옆에 있는 큰 쌀 궤짝은 작은 뒤주의 쌀이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쌀을 채워 놓는 창고 역할을 한다. 운조루 주인은 매년 쌀 30여 가마를 이렇게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데 썼으며 구걸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뒤주를 설치했다. 또 이 운조루는 굴뚝을 담 밑으로 낮게 설치하여 밥 짓는 연기가 되도록 가난한 집 주변으로 퍼지지 않도록 하였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삶을 나누려는 배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동학란과 6.25 전쟁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운조루가 지금처럼 건재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모두가 함께 살자는 相生精神(상생정신) 즉 타인능해 정신 때문일 것이다.
경북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는 世間(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선조 32년(1599년)에 설립한 存愛院(존애원, 경상북도 기념물 제89호)이라는 오래된 건물이 넓은 들판이 보이는 낮은 언덕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곳은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고 질병 앞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 당시 상주지역 백성들이 자생적으로 탄생시킨 전국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이다. 존애원에서는 지역 주민에 대한 의료 활동을 주 업무로 하면서 鄕風 刷新(향풍 쇄신), 후진을 양성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는 강학소, 경로잔치 등의 역할도 하였다. 이 고장 출신이면서 1586년 과거에 급제하여 경상감사, 홍문관 대제학, 사헌부 대사헌, 형조·예조·이조 판서 등을 지낸 愚伏(우복) 鄭經世(정경세) 선생을 중심으로 성람(초대 주치의), 이준, 김각, 이전, 강응철, 김광두 등의 선비들이 ’존심애물(存心愛物)’의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려는 뜻에서 존애원을 설립하였다. 존애원이라는 명칭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돕게 된다’는 송나라 선비 程子(정자)의 존심애물에서 따온 말이다.
‘쌀독의 문을 누구든지 열고 쌀을 가져가라’는 ‘타인능해 쌀독’에서 보여준 운조루 어른들의 남을 먼저 배려하는 상생정신이나 임진왜란 후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설립된 전국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의 博愛精神(박애정신)은 요즈음 말하는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사회적 책임과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이다.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德目(덕목)이 바로 ‘봉사’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 중의 제일이 남을 위한 배려와 봉사이다. 배려와 봉사는 사회를 밝게 하는 횃불이다. 봉사는 삶의 보람이고 자기완성의 수단이자 목표이다. 새해 연말연시 타인능해 정신으로 불우한 이웃과 삶의 나눔으로 기쁨을 함께 하자.
임주석 기자 scent1228@naver.com “새 감각 바른 언론” - Copyrights ⓒ경북중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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